쥬랜더를 처음 봤을 때 이게 진짜 영화가 맞나 싶을 정도로 황당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주인공이 멍청할수록 웃기고 말이 안 될수록 더 재미있는 영화인데 보다 보면 어느 순간 패션 업계에 대한 꽤 날카로운 시선이 담겨 있다는 걸 느끼게 됩니다. 머리를 완전히 비우고 봐야 제대로 즐길 수 있는 영화인데 그 상태에서 보면 생각보다 훨씬 재치 있습니다. 벤 스틸러가 감독과 주연을 동시에 맡아 이 정도 완성도를 낸 것도 놀라운 일입니다. 이십 년이 넘은 지금 다시 봐도 여전히 웃기고 여전히 유효한 풍자가 담긴 영화입니다.

🎬 개봉일: 2001년 | 장르: 코미디 | 러닝타임: 89분 | 감독: 벤 스틸러
영화 쥬랜더의 패션 업계 풍자
쥬랜더는 겉으로는 황당한 B급 코미디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패션 업계의 허영과 상업주의를 꽤 날카롭게 풍자하는 영화입니다. 영화 속 패션 업계는 싼값의 노동력을 유지하기 위해 각국 지도자를 암살하는 음모를 꾸미는 집단으로 묘사됩니다. 웃기기 위한 과장이지만 그 안에는 패션 산업이 실제로 아동 노동과 저임금 공장에 의존해 왔다는 현실에 대한 풍자가 담겨 있습니다. 데릭 쥬랜더라는 캐릭터 자체도 패션 모델에 대한 대중의 편견을 극단까지 밀어붙인 존재입니다. 잘생겼지만 아무것도 모르고 자기 자신에게만 집중하는 인물로 그가 세상 돌아가는 것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장면들은 모델이라는 직업군이 소비되는 방식에 대한 조롱이기도 합니다. 영화 초반 쥬랜더와 친구들이 주유소에서 기름을 서로에게 뿌리며 장난을 치다 폭발하는 장면은 아무 생각 없이 사는 사람들의 허무한 최후를 코미디로 표현한 것입니다. 패션 잡지 기자인 마틸다가 업계의 어두운 이면을 파헤치는 역할로 등장하는 것도 이 영화가 단순한 웃음 이상을 노리고 있다는 신호입니다. 바보 같은 웃음 뒤에 꽤 진지한 시선이 숨어 있다는 점이 쥬랜더를 단순한 오락 영화 이상으로 기억하게 만드는 이유입니다. 개봉 이후 20년이 넘은 지금도 패션 업계를 다룬 영화 중 가장 통쾌한 풍자로 자주 언급되며 유행에 민감한 업계일수록 그 유행을 비웃는 시선이 더 오래 살아남는다는 걸 이 영화가 증명합니다.
무가투와 세뇌 플롯
쥬랜더의 메인 플롯은 악당 패션 디자이너 무가투가 데릭 쥬랜더를 세뇌해 말레이시아 총리를 암살하게 만들려는 음모입니다. 무가투는 윌 페렐이 연기하는데 온몸에 흰색 의상을 두르고 작은 개를 품에 안고 다니는 이 캐릭터는 악당이라기보다 패션 업계 최악의 자기도취자를 희화화한 인물입니다. 세뇌 방식도 황당하기 짝이 없습니다. 프랭키 고스 투 할리우드의 릴랙스라는 곡이 트리거가 되어 쥬랜더가 살인 기계로 돌변하는 설정인데 이 아이디어 자체가 첩보 영화의 세뇌 클리셰를 철저하게 비튼 것입니다. 영화의 클라이맥스에서 쥬랜더가 암살 명령을 받은 순간 자신의 궁극의 표정인 매그넘을 선보이며 위기를 넘기는 장면은 황당함과 통쾌함이 동시에 터지는 이 영화의 정점입니다. 무가투라는 캐릭터는 영화 전반에 걸쳐 웃음의 원천이 되는데 윌 페렐 특유의 과장된 연기가 이 역할과 완벽하게 맞아떨어집니다. 실제로 말레이시아에서 총리 암살 묘사를 이유로 상영 금지 처분을 받았다는 사실도 황당한 플롯이 현실과 엉뚱하게 맞닿은 흥미로운 에피소드입니다. 세뇌 플롯이 말이 안 된다는 것을 영화 스스로 알면서 그 황당함을 무기로 삼는 방식이 쥬랜더만의 개그 방식입니다. 윌 페렐이 이 캐릭터로 얻은 팬덤은 지금도 건재하고 무가투는 2000년대 할리우드 코미디 악당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캐릭터 중 하나로 손꼽힙니다.
영화 속 역대급 카메오
쥬랜더에서 빼놓을 수 없는 즐거움 중 하나는 영화 전반에 깔린 화려한 카메오 행렬입니다. 데이비드 보위가 쥬랜더와 헨젤의 워크오프 대결에서 심판으로 등장하는 장면은 이 영화를 통틀어 가장 많이 회자되는 명장면 중 하나입니다. 도널드 트럼프와 멜라니아 트럼프 부부 빅토리아 베컴 위노나 라이더 나탈리 포트먼 패리스 힐튼 그웬 스테파니 톰 포드 도나텔라 베르사체 등 당시 패션과 연예계를 대표하는 인물들이 모두 자기 자신으로 줄줄이 등장합니다. 패션 업계를 비웃는 영화에 패션 업계 실존 인물들이 직접 등장해 스스로를 웃음거리로 내어주는 방식이 아이러니하게도 이 영화의 가장 세련된 부분입니다. 훗날 세계적인 배우가 된 알렉산더 스카스가드가 유명해지기 전에 쥬랜더의 모델 친구 중 한 명으로 단역 출연한 것도 나중에 알면 흥미로운 발견입니다. 이 카메오들은 단순히 유명인을 소비하는 방식이 아니라 영화가 풍자하는 세계에 그 세계의 실제 구성원들이 동참함으로써 풍자의 완성도를 높이는 역할을 합니다. 누가 언제 어디서 등장하는지 눈 크게 뜨고 보는 재미가 쥬랜더를 여러 번 다시 보게 만드는 이유 중 하나이고 볼수록 새로운 얼굴을 발견하게 됩니다. 카메오 하나하나가 그 자체로 시대의 기록이기도 해서 지금 보면 당시 유명인들의 면면을 확인하는 타임캡슐 같은 재미도 있고 그 시절의 팝 컬처를 기억하는 관객이라면 더욱 즐겁게 볼 수 있습니다.